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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년 4월 20일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 둘은 날이 밝은 대로 집을 나와 페어게이트로 갔다. 어제 답답이는 현지인들은 대충 알고 있으니, 땅값이 오를대로 올랐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안전가옥에 오기 전에 복덕방 주인에게 알아본 바, 현지인들 조차도 모를 극비 소식이란게 확인되면서 답답이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알아본 정보에도 허점은 있다. 우리의 안전가옥이 있는 로딕피크는 페어게이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그래도 거리가 없는건 아니거든. 진짜배기 정보는 아마 페어게이트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해서 답답이에게 설명을 했고, 답답이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 준비기간이니 시세차익은 확실히 얻을 수 있을거라고 이해했다.

 

“로키군.”

“응? 왜?”

“미안한데, 니캅 좀 꺼내줄 수 있어요? 햇볕이 너무 따가워요.”

 

나는 가방을 뒤져 니캅을 꺼내 주었고, 답답이는 그것을 허겁지겁 달았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르짐 산맥의 아래에서 산비를 맞으며 살던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던 곳을 떠나, 풍토가 판이하게 다른 이곳 사막에서 정착을 하려니 오죽 고되겠는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간의 3개월은 답답이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됐어. 그런 거에 일일이 고마워하지 마.”

“알았어요...... 아, 벌써 다 왔네요.”

“그러게, 생각보다 일찍 왔는걸?”

“그런데 이곳 입구는 괜찮은 거에요? 저걸 저대로 두면 꽤나 위험할 것 같은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페어게이트의 입구에 다다랐다. 답답이가 언급한대로, 이곳의 입구는 꽤나 특이한데, 걸쇠도 없는 두 개의 커다란 문이 기둥처럼 마을 입구에 덩그러니 서있거든. 한때 이곳은 프로하기온으로 들어오는 관문 마을 중에 하나였는데, 아주 오래전 대륙 전체를 휩쓸었던 전쟁의 여파로 문이 막고 있던 성벽 일대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사실, 전쟁이 남기고간 흔적은 이것뿐만이 아니라 프로하기온 곳곳에 남아있다. 일부 개발론자들은 이 흔적을 치워버려야 하는거 아니냐고, 왜 이런 노른자위 땅에 흉물스러운 것들을 남겨 두냐고 묻지만,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후대가 할 수 있는 건 잊지 않는 것이다.’라는게 대다수 사람들의 중론이다. 페어게이트의 흉물은 그렇게 남겨졌고, 마을의 상징이 된 것이다.

 

“으음,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이군요.”

“뭐 비슷한 셈이지.”

“그런 깊은 생각을 가진 도시에서 재개발을 하는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거 같은데요?”

“뭐...... 내가 결정을 내린게 아니라서 함부로 말하긴 어렵겠지만, 역사는 역사고 돈은 돈이지.”

 

답답이는 내 말에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때렸다. ‘요즘은 농담도 제법 할 줄 아는데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답답이와 페어게이트로 들어왔다. 제법 퇴락한 건물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딱 봐도 발로 툭 치면 무너지게 생겼는데요?”

“행여라도 진짜 그렇게 하지마라.”

“에이, 메타포죠. 정말 제가 툭 친다고 무너지기야 하겠어요?”

“내 옆구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는군.”

“이 사람이 정말......”

 

나는 답답이가 내 옆구리를 한 번 더 때리기 전에, 걸음을 빨리하여 근처의 복덕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답답이의 발걸음이 들려왔다. 모래바닥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땅을 디디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라면, 녀석이 보통 화가 난게 아닌 듯 했다. 왜인지 모를 웃음이 나면서, 녀석을 좀 더 약올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잡히면 녀석의 분노가 풀릴 때 까지 나를 쥐여박을 것 같아서 나는 좀 더 걸음을 재촉했다.

 

“어여 와....... 아이고, 부부가 금슬이 좋아뵈는구먼.”

“이게 금슬이 좋은 걸로 보이시나보군요.”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복덕방 할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법 한 것이, 꼬리 빠지게 도망치는 나와, 답답이가 이를 악물고 쫒아오는 답답이의 더러운 추격전이 문설주를 코앞에 두고 기어코 추접스러운 결말로 끝이 나던 차였거든 답답이는 내 머리채를 잡고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찔러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나를 놓아주었다.

 

“젊은께로 그런 장난질도 되는거여. 우리 영감쟁이는 그리 허다가는 붕대 감구 관 짝에 들어갈 판이유.”

“뭐시여? 내가 임자보다 하루는 더 살고 갈라니께 나대지좀 마씨요.”

“그러슈 나보다 세끼 더 자시고 오슈, 오믄 저승처사 옆에서 때깔 검사 할거유.”

 

할머니의 말에 구석에서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발끈했고, 이내 둘은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우리의 장난이 뜻하지 않게 두 노인들의 다툼으로 번져나가자, 오히려 우리가 뻘쭘해져서 서로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그래도 노인이라 체력이 얼마 없었는지 둘은 세 마디 이상 더 하지 못하고 숨만 씩씩거렸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곤, 아예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미안해 했다.

 

“젊은 아가들 앞에서 노인이 추태를 부려버렸구먼. 이래서 늙으면 디져야댜. 근데 임자들은 무슨 일로 온거여?”

“집을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도 숨을 고르고 나서는, 당신도 적적했는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슥 보더니 ‘아따 늙으니 턱주가리에 구멍 뚫렸는 갑소?’라며 적삼을 꺼내 그의 턱을 닦아주었다. 할아버지는 ‘아따 샥시가 안보이자네!’라며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로 할머니의 적삼을 뿌리쳤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챙겨줘도 지랄이네.’라고 꿍얼거렸다. 답답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쿡하고 웃어버렸다. 할아버지는 눈이 가늘어졌다.

 

“아따 처자가 허버 고와브요. 옛날 생각나는구먼. 이 할마씨도 젊을 때는 제법었제라.”

“기제, 나가 남편하나 잘못만나서 신세 조졌슈.”

 

서로를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또 다른 싸움이 발발할까 싶어, 나는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근처에 싼 데 있나 싶어서요.”

“아아, 젊은 것들 앞에서 또 쪽실릴 뻔 했구마잉. 싼디야 쌔고 쌨제, 그란디...... 싼디를 찾을라믄 발품을 쪼깐 팔아야 쓸거신디, 괜잖을라나 싶소.”

“저희야 상관없어요. 할아버님께서 몸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돌아보죠 뭐.”

“아따, 괜자능께 걱정마씨요. 그라고 내가 늙어도 제법 깡깡허요.”

 

 

 

 

 

 

Channel 2. 아이리스

 

예상을 못한바는 아니었지만, ‘늙어도 제법 단단하다.’는 할아버님의 말씀은 희망사항이었다는 게 밝혀진 뒤로, 로키군은 할아버님을 업고 페어게이트 이곳저곳을 돌아야만 했습니다. 저는 로키군의 뒤에 붙어서, 할아버님의 발을 받쳐드리며 뒤를 따랐어요.

 

“아따 낭군 고생시켜서 미안시럽구마잉.”

“괜찮아요. 오늘 고생 좀 해야 하거든요.”

“양성평등이 하루속히 이 나라와 사회에 자리 잡아야 할 텐데 말이지.”

 

저는 로키군의 투덜거리는 말을 짐짓 무시하고, 할아버님의 흐트러진 케피에를 바로잡아드렸습니다. 할아버님은 제 손길에 씩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이런 참한 샥시랑 함께 거시기 해브는거 보믄 낭군이 제법 복받았는 갑소.”

“그렇죠? 제 서방 들으라구 다시 한 번 크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압니다. 알아요. 제겐 정말 과분한 여자인걸요.”

 

할아버님은 로키군의 어께를 툭툭 두드려 주시곤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셨어요.

 

“쩌그만 가면, 오늘 마지막 코스닝께 쪼깐만 더 힘쓰면 되네.”

“거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이네요.”

“근디, 각시랑 살건디 너무 싼 집만 알아보는 거 아닝가? 사람이 돈이 읎어도 가오는 있어야제.”

“에이, 괜찮아요. 열심히 돈 모아서 다음 집은 더 큰 데로 가면 되죠. 뭘.”

“아따, 자네 서방은 전생에 나라도 구했는 갑소. 혹시나 서방이 섭섭하게 하면, 나한티 오소, 내 잘해 줄랑께.”

 

할아버님은 기운을 차리셨는지 낄낄 거리며 로키군의 등을 두드리셨습니다. 로키군은 대답대신 할아버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앞에는 이제껏 봐온 집중에서도 가장 허름한 가옥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쪼깐 거시기 헌디, 흙 바르고 하면 살만 할 거시여.”

“음..... 저기에 사람이 살긴 살아요?”

“살제라. 아야, 인자 내려봐라잉. 이보! 연가 있는가?”

“예. 어르신이 무슨 일이유?”

 

할아버님께서 로키군의 등에 내려서는 뒷짐을 지시고 사람을 불렀습니다. 할아버님의 말에 집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허름한 집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답니다. 그곳에는 딱 보아도 궁기가 흐르는 부부와,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들이 열 댓 명이 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네 근자에 집 내놓지 않았능가, 거시기 허러 왔네.”

“아이구 안녕하셔유. 연흥부여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남자는 로키군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름을 보니, 라스알하게 출신 사람인 모양이에요. 이야기가 옆으로 새나가는 것 같지만, 라스알하게 인은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가난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 같아요. 그점은 참 마음이 아픈 것 같습니다.

 

“전 산냐신이라고 합니다.”

“집보러 오셨담서유? 저희가 라스알하게로 돌아갈라는디, 돈이 부족혀서...... 남은 이집이라도 처분혀야 차비라도 나올 참이네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네유.”

“아니, 저는 그냥 일단 보기만.......”

“아 이잉, 일단 들어와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일행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밖에서 본 만큼이나 안쪽도 제법 낡아있었어요. 밖에서 본 구멍은 안에서 종이로 덕지덕지 막아놓았고, 방문마다 모서리가 깨지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흙집이라서 그러겠거니 해도 좀 심하다 싶긴 했지요.

제가 집안을 둘러보는 동안, 로키군도 다른 곳에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고개를 흘끗 돌려보니, 그의 표정도 썩 밝아보이진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단 말인가?’라는 경악의 감정이 고스란이 드러나 있었답니다.

 

“아따, 허버 꼼꼼시럽게 보는구마잉 내가 시방도 말했듯이, 흙 바르면 살만 하당께라!”

“걱정 마셔유, 구멍난디는 지들이 이사가믄서 다 메꿔 놀게유.”

“음...... 그게요.”

“혹시, 이 근처엔 적당한 진흙 밭이 있습니까?”

“진흙밭? 그건 뭐 땀시 그렇소?”

“이사 가려면 그 자체로도 바쁠 텐데 흙 바르는 건 저희가 하려고요.”

“이잉?”

“네? 여보 잠깐만.”

 

로키군의 말에 저 뿐 만 아니라, 두 사람들의 눈도 휘둥그레졌습니다. 잠깐만요, 이런 다 낡은 집을 산다고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근데 그런 생각을 한건 저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할아버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두 눈을 찡그리셨고, 흥부라는 분은 멍해져서 입을 떡 벌리셨어요. 딱 보아도 그들 역시 이 집이 나갈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저는 일단 로키군을 데리고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로키군.”

“이 집을 사자는 거지 뭐.”

“이런 다 낡은 집을 사자고요? 제정신이에요?”

“집이야 고치면 그만이지.”

“아니...... 좋아요. 이 집을 사야하는데 로키군이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대체 이런 다 낡은 집을 왜 사자고 하는거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그의 판단에 화가 나려고 했지만, 저는 화를 표출하기에 앞서 잠깐 심호흡을 했습니다. ‘잠깐 멈춤’이라고 하지요?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잠깐의 심호흡을 함으로써 마음을 누그러뜨릴 여유를 가지는 것 말이에요. 물론 그렇게 큰 효과가 나오는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한 마디의 말을 들어줄 여유만 되더라도 충분하다는게 ‘잠깐 멈춤’기법의 핵심이라고 해요. 확실히 심호흡을 하고나니, 화가 누그러든건 아니지만, 그의 말 한마디의 변명이라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정도는 들더군요.

 

“이 집이 쓰레기 같은 건 나도 알아.”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근데, 집의 위치가 제법 괜찮거든. 여긴 이제까지 봐온 곳 중에서 가장 페어게이트의 중심과 가까운 곳이라고. 너도 오면서 봤을거 아니야?”

“중심이요?”

“그래, 재개발을 한다고 하면, 중심지역에 뭐가 들어서겠어? 여기만큼 땅값의 상승폭이 큰 데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단 말이야.”

“.......”

 

‘잠깐 멈춤’이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의 말 한 마디를 듣기까지는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지만,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는데,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는 데는 처음보다는 인내심의 방지턱이 많이 낮아지더라고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저는 그의 말에 어느정도 설득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단......말이죠?”

“거기에, 저 사람들이 뭐랬어? 이사 갈 정도 자금만 있으면 감사하겠다고 하잖아. 이런 노른자위 땅을 그 정도 돈으로 퉁친다면 개발 보상금만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득이 꽤 나갈거라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보이는게 많아진 걸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님과 흥부씨가 저희를 흘끗흘끗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좋아요...... 로키군의 말대로라면 정말 이사비용만으로도 충분히 큰 이익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겁나게 좋은 일 하는거여. 분명 복으로 돌아올 거시네.”

“그렇게 되기를 바래야겠지요.”

 

답답이의 동의를 받고, 우리는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흥부라는 사람과 함께 복덕방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봐서 서둘러서 계약서 종이를 가지고 왔고, 흥부라는 자도 품안에서 인감도장을 꺼냈다. 우리는 노인이 계약서를 완성하는 것을 꼼꼼하게 지켜보았다.

 

“자, 보시라고들, 매매자는 연흥부, 매수자는 산냐신과 이슬란. 아따 둘이 공동명의로 하려나 보구마잉. 계약금은 40파운드 걸어놓고, 잔금 379파운드는 매매자 이사 2주 전이니까...... 아야, 니 언제 이사가냐?”

“5월 26일이유.”

“그려? 그럼 5월 12일에 치르는 걸로 하세. 괜잖은가?”

“아 뭐 저희는 괜찮은거 같아요.”

“지도 그러구먼유.”

“자 그럼 도장들 찍어블자고.”

 

흥부는 자신이 꺼내놓은 도장을 찍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도장 자체가 필요없는 삶을 살아왔기도 했지만, 가짜신분으로 사는 처지인지라 당당하게 관청으로 가서 인감도장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답이도 그걸 알고 나를 쳐다봤다.

 

“저기 근데요 어르신.”

“잉? 말 혀.”

“저희가 인감도장을 미처 만들지를 못했는데. 혹시 지장으로 대체 가능할까요?”

“뭐...... 인감이 젤로 씨긴 한디. 지장도 받아는 주제. 그래도 신원은 확인을 해야 쓰니까, 사인하고 그 여피다가 지장을 찍으소.”

“네....... 여기 찍었습니다.”

“잉. 잘혔네.”

 

할아버지는 두 부의 계약서를 나누어 하나는 나와 답답이에게, 다른 하나는 흥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흥부는 내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에, 계약금으로 지갑에서 50파운드 지폐를 꺼냈다. 내가 그에게 지폐를 내밀자, 흥부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쩌그...... 거스름돈을 드릴 수가 없구만유.”

“네?”

“미안한데, 딱 40파운드로다가 주실 수는 없는감유?”

 

거스름돈 10파운드를 줄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하고 그 속사정을 물어보려는 찰나에, 답답이가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면서 별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옆구리를 문지르며 그 고통을 소리 없이 삭이는 동안 답답이는 내 손아귀의 50파운드를 홱 뺏고는 자기 지갑에서 10파운드 지폐 4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러면 딱 맞죠?”

“맞네유. 감사혀유.”

 

흥부는 그녀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고, 그녀는 그의 손을 맞잡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내 말을 틀어막기 위해 옆구리를 꼬집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50파운드가 흔한 돈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흥부와 같은 빈자에게는 10파운드마저 만지기 힘들 정도로 큰돈이었던 것이다. 내가 무심코 그에게 던질 뻔한 그 질문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될 만한 이야기였던 거지.

 

“그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복덕방을 나와 집으로 가던 도중에,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니, 답답이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했다.

 

“잘 생긴 사람한테는 못생겼다고 놀려도 되요. 하지만, 못생긴 사람에겐, 못생겼다는 말은 꺼내면 안돼요.”

“정말 못생겼으니까?”

“그런 셈이죠. 사람에겐 누구나 ‘남들에겐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에요.”

“‘남들에겐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라...... 너도 그런게 있나?”

“있죠. 당연히. 아마 그건 로키군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글쎄,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그걸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역린이라고 알아요? 라스알하게에선 용이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좋은 동물로 여겨진대요. 그런데 그 용에게는 자신의 몸에 난 비늘들과 반대방향으로 돋아난 단 하나의 비늘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 이야긴 들어본 거 같아. 그걸 건드리면 용이 건드린 사람을 바로 물어 죽여 버린다고 했던거 같은데.”

“물론 사람사이에선 칼부림이 나진 않겠지만...... 확실히 적이 되겠죠.”

“그런게 너도 가지고 있다 이거지?”

“그럼요.”

“의외네......”

“궁금하다고 무턱대고 찾아보려고 하진 마요. 난 당신의 적이 되어봤자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나만 너무 손해 보는거잖아.”

 

답답이가 툴툴거리는 얼굴로 사구의 모래를 퍽하고 걷어찼다. 모래는 그녀의 발길질에 공중위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산 능선을 넘는 구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란건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어. 친소관계에 따라 열어가는 폭이 달라진다는 것, 친하면 친할수록 그 폭과 깊이가 깊어진다는건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거잖아.”

“더 이해하기 어려운거 알려드려요?”

“그게 뭔데?”

 

 

 

 

 

 

 

Channel 2. 아이리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한테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오히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

“진짜로?”

“그럼요.”

“나 참나. 뭐 그런게 다 있냐?”

“그러니까 마음이죠.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이라고요.”

 

제 말을 듣는 로키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로키군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인식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도 하지만, 로키군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완전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하지만 어느 정도 근거는 있지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 높은 확률로 또 만날 가능성이 낮잖아요.”

“그렇지. 대륙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사람이 가장 간직하기 괴로운 게 바로 ‘비밀’이래요. 남들이 모르는 걸 혼자서만 알고 있는 건, 처음에는 짜릿함을 주지만, 그 짜릿함만큼 그걸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동시에 작용하거든요. 쉽게 말하면 ‘잘난 체’를 하고 싶은 거겠죠?”

“그래서?”

“비밀은 말하고 싶은데, 그건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고......엄청난 딜레마죠.”

 

저는 잠깐 말을 멈추고 로키군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람 탓에 로키군의 케피에에는 모래가 제법 수북히 쌓였지만, 제 말을 듣는데 정신이 팔린 그는 흘러내린 모래가 이마에 덕지덕지 붙는지도 모르게 제 말에 빠져있었어요. 집중하는 모습은 섹시하지만, 너무 몰두하면 보기 좀 그래요. 저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묻은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로키군은 집중이 흐트러진 것이 기분 나빴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제 손을 쳐내더니 모래를 벅벅 문질러 닦아냈어요,

 

“이런 것 쯤은 나도 알아서 해. 날 너무 애기 취급하는 거 같은데.”

“칼을 지키는 칼집이라면 이 정돈 기본이죠.”

“그나저나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고...... 잠깐만.”

 

로키군은 페어게이트 입구에 다다를 때 쯤, 셔벗 좌판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좌판의 할머니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셔벗 두 개가 들려있었어요.

 

“뇌물치고는 너무 저렴한 거 아니에요?”

“...... 닥치고 주는 대로 처먹어.”

“네.”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의 미간이 제대로 내 천자를 그리는 것이, 정말 그가 화가 난 모양이에요. 선을 넘는다고 하지요? 저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곤 셔벗을 스푼 가득히 담아 우걱우걱 먹었습니다. 입안으로 셔벗의 달콤한 맛이 샘물처럼 왈칵 솟아나왔습니다.

 

“그래서 말해봐,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지 말이야.”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기도 해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려준 사람과 그 다음날, 혹은 몇 시간 뒤에 또 본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어색하겠어요?”

“음.......”

“반대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은 만남 이후에 또 다시 만남을 가지기에는 많은 노력과 약속이 필요하겠죠. 즉, 안하면 그만이에요.”

“또 볼일이 없으니, 비밀을 말해도 뒤탈이 없을거라 이건가?”

“그렇죠.”

“음......”

 

로키군은 제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말없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 로키군의 모습은 프로하기온에 온 뒤로 종종 본 적이 있어요. 라스알게티에서의 로키군은 ‘위에서 지시한 대로만 하면 될 뿐, 지시하는 것에 어떠한 의문도 회의도 가져선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다면, 프로하기온에서의 로키군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앞두면 깊은 생각에 잠겨들어가더군요. 앞서 셔벗 때처럼, 로키군에게도 넘지 말아야 할선이 있다면, 지금의 로키군에게 말을 걸어보아야 별다른 소득을 거둘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지난 석 달 동안 로키군과 함께 하면서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생각에 잠긴 동안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그를 지켜보며 함께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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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이해는 되는구먼. 매우 이기적이지만, 그만큼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맞아요. 자연스럽다는 게 반드시 옳은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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