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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로부터 20여 년 후. 

61번 섹터 내, 브랜치 양성학교.

 

"이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세계는 결국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우월하며, 예전에 인간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약점과 불안함을 고쳐 딛고 일어선 것이지."

 

교수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교과내용을 진행할수록 조금씩 혐오와 멸시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인간들은 세상이 바뀌기 직전까지도 불합리한 부의 분배로 부익부 빈익빈을 극대화했고 자신들이 만든 정치체계의 모순과 핵무기에 전전긍긍해왔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러한 극도의 혼란 속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과 공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피가 필요하며, 우리는 그들의 공정하고 평화로운 지배가 필요한 것이다."

 

교수의 그런 어조는 강의가 계속 될수록 사그러들지 않았다. 하얀 색의 천을 마치 그리스 시대의 옷처럼 휘둘러 걸치고 있는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눈빛은 진지했다.

 

브랜치 양성학교. 여기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일명 '브랜치'라는 계급이 되어, 섹터의 행정과 관리를 행하는 직급에 앉거나 왕도에서 뱀파이어들을 섬기며 일할 수 있는 직무를 부여받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인간들에게는 섹터 안에서 농부와 소상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은 남아있지 않았다.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농부와 소상인들이 식량을 둘러싸고 보이는 이기주의와 갈등과 분열의 상황들을 보며 느낀 것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과거의 세계가 있었는지조차 잘 모르고, 인간 중 그나마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예전의 이야기들을 듣는게 고작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브랜치 양성학교에서 역사 강의를 듣지 않는 인간 젊은이들이라도, 늙은 세대의 회상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의미 없는 추억의 포장 같은 느낌에, 한편으로는 그런 어리석은 세상을 고치지 못했다는 일종의 원망까지 더해지는 것. 그것이 섹터에 갇혀 있는 인간들 세상의 분위기였다. 

 

브랜치 양성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역사와 철학도 가르치지만, 그 어떤 걸 공부해 보더라도 모든 문제는 인간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학생들의 눈에는 분명했다. 인지심리학, 사회과학, 철학 등 어떤 학문을 보아도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멍청함만 키워오며 갑론을박만 일삼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 뱀파이어는 구세주와도 같기에,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런 교육들 속에서 점점 깊게 자리잡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어찌 되었든, 이 강의의 시간 속에서 데스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곱씹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의 노트에는 한 문장만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표어처럼 빈 공간을 꽉 채우며 쓰여 있는 그 문장은, 계속 데스틴을 더 초조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는 효과가 없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은 불안과 불확실 속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 속에 교수의 질문이 끼어 들어왔다. 

 

"데스틴 프리드먼 군? 다른데 넋을 놓고 있을 정도로 내 강의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의 여왕께서 뱀파이어의 약점인 태양광선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를 모두에게 설명해줄 수 있겠나?"

 

교수의 날이 선 어조에 데스틴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교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여왕께서는 약점의 극복을 위해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 바이오 약품 회사를 세우고 뱀파이어 관련의 연구에 투자하여, 뱀파이어의 유전자적 약점에만 작용할 수 있는 약품의 개발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먼 한국이라는 땅에 그러한 회사를 세웠는지도 알고 있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통합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불완전한 통제권에 있는 서구의 뱀파이어 세력들과 물리적 거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고, 둘째로는 그 국가의 정경유착이 어리석다고 판단될 정도로 심하여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심하지 않았다는 것, 셋째로 서구권 정치세력들의 감시가 그다지 심하지 않으면서도 타국에 친화적인 금융 환경이 갖춰진 때문입니다."

"잘 알고 있군. 훌륭해. 이제 내 수업에도 자네가 아는 지식만큼의 예의를 보여주면 좋겠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는 데스틴의 훌륭한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의 뒷편에는 의아함도 숨어있었다. 데스틴 프리드먼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학생이 아니었다. 

 

학교 내에서는 섹터장의 양아들이라는 후광을 받는 존재 이상으로 학과의 전 부분에서 우수함을 보이고 있으며, 체육 쪽이나 검술에도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보여 완벽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학생이었다. 인간이 우월하다거나 존재로써 인정받아야 한다는 불순한 세력의 생각을 표현하는 불미스런 일도 없고 예의도 바른데다 학생들뿐 아니라 섹터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인기도 많은 학생이다. 동양계 특유의 검은 머리와 서구적인 얼굴이 잘 어우러져 신비스런 이미지까지 갖추었다. 

 

그런 학생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란 건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교수는 궁금증을 대수롭지 않게 접었다. 데스틴도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 위치였다. 진로나 일신에 관한 일일 것이 뻔하다고 넘겨짚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의실 안에는 그 의아함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있었다.

데스틴과 오래도록 함께 해 온 우수한 친구, 니콜라스 헤이든이 그랬다.  

 

"정신차려, 임마!"

 

나무로 만든 롱소드가 휙 자신의 눈앞으로 휙 내려오는 것을 보며 움찔한 데스틴에게, 그 검을 휘두른 니콜라스가 다시 간격을 벌리며 소리쳤다. 

 

"대련 중에 뭐하는 짓이야!"

 

학교 내의 검술대련 시간이라는 걸 깨달으며 데스틴은 자신의 손아귀 속, 중간 길이의 목검을 다시 제대로 움켜쥐었다. 그 목검은 원래 학교에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데스틴 자신이 깎아 만든 것이었다. 학교에서 지급하는 목검은 거의 모두가 롱소드의 길이였고, 간혹 철퇴 같이 타격무기를 흉내낸 것도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여전히 그 작달만한 것을 가지고 뭘하겠다는 건지. 동양 쪽의 검이 그런게 많다던데. 너 그러다 실제 전장에 나가면 진짜 칼에 단박에 죽는다?"

"전장? 브랜치가 전장에 나갈 일이 뭐가 있겠어. 그리고 지금은,"

 

데스틴은 검을 잡고 자세를 잡으면서 말했다. 

 

"너한테도 지지 않을텐데."

"근데 이자식이?"

 

니콜라스가 미소를 한 번 지어보이더니 갑작스레 돌격을 시도했다. 롱소드의 보법 휘두르기의 자세와 보법이었다. 하지만 데스틴은 그가 휘두르기로 공격해 올 거라고 믿지 않았다. 

 

보법 진행 중에 변화를 주며 자세를 재빠르게 바꾸는 건 데스틴이나 니콜라스나 이미 익숙해져 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역시 자세를 바꾸어 내리치기로 다가왔다. 롱소드가 가진 중량과 데스틴이 가진 짧은 검에는 내리치기가 역시 제격이었던 것이다. 

 

니콜라스는 이대로 들어간다면 자신의 승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데스틴은 내리치기의 궤도 옆으로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깃털이 움직이는 것 같은 움직임 속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대련 때만이지만, 니콜라스는 데스틴의 이런 분위기가 불쾌했다.

 

"차앗!!!!!"

 

니콜라스는 내리치기의 칼을 휘두르기로 억지로 바꾸었다. 꽤 힘이 들어가고 어려운 기술인데도 롱소드에는 묵직함이 실려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마저 데스틴은 쉽게 흐트러뜨려 버렸다. 

 

휘두르기가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데스틴의 목검은 롱소드의 검신에 붙어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들어오는 힘을 그대로 흘려내면서 데스틴의 작은 목검은 롱소드의 검신을 공중으로 높이 날려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니콜라스의 목에 데스틴의 목검 끝이 파고들어와 멈추었다. 

 

"말했잖아. 이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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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열심히 생각해뒀던 필살기들이었는데, 그걸 받아내다니. 역시 교내검술대회 3연속 우승자 답네. 도대체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학교 뒤편의 풀이 무성한 언덕. 따뜻한 햇빛이 온몸에 녹아드는 것 같은 시간. 구름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니콜라스는 같이 나란히 누워있는 데스틴에게 물었다. 데스틴은 계속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로는 잘 설명이 안되는 놈이라서. 미안하다."

"됐다. 다음에 이겨버리면 그만이야."

 

장담하듯 말을 꺼내고 나서, 둘은 잠시 풍경을 바라보느라 넋을 놓았다. 그러다 니콜라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역시 너같이 대단한 놈도 진로가 걱정되는, 그런거냐? 아까 수업시간에 멍때리던 거 말이야."

"뭐, 걱정되긴 하는데, 단순하게 그런 일들 때문은 아냐."

"무슨 말이야? 단순하다니. 그거보다 더 큰 일이 있어?"

"더 큰 일이 있지. 예를 들면, 아버지가 된다는 거 같은."

 

니콜라스는 벌떡 몸을 일으켜 놀란 눈을 데스틴에게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된다니?"

"말 그대로지 뭐."

"애엄마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미리암이라는 애?"

"그래."

 

어쩐지. 한동안 그 미천한 계집이 안보인다 싶더라니. 니콜라스는 멍해지는 눈동자를 데스틴으로부터 돌렸다. 감히 자기 같은 사람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농부의 딸. 그런 여자애가 친구의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의 애를 임신하고 있다니.

 

"출산이 언젠데?"

"다다음주 쯤?"

"부모님께는 얘기했냐?"

"오늘 하려고."

"제정신이냐? 부모님 얼굴에 먹칠한다는 생각은 안해봤냐?"

"그 점이 좀 걱정이긴 하다. 졸업하기도 전에 일을 벌렸으니."

 

미쳤냐. 그런 버러지 같은 여자가 애를 뱄다고 거기에 묶여서 인생을 망치겠다고? 그딴 걸림돌 따위 버리고 나와 함께 왕도에서 더 나은 출세의 미래를 꿈꿔보는건 어때? 애 따위는 지워버리라 그래. 아니면 둘 다 함께 세트로 아무 뱀파이어에게나 바쳐서 죽여버리기라도 하던가. 

 

이런 말들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오가다 이내 삭혀져 버렸다. 그런 것들이 쉽게 입밖에 나올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데스틴의 제일 친한 친구 역할을 해온 것도 이런 어두운 감정들을 제법 잘 숨겨온 덕이었다. 

 

그런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싹 지우고, 표정마저 잘 조절하면서 니콜라스는 말했다. 

 

"어쨌든, 정말 축하한다. "

"고맙다, 친구야."

  

친구의 축하에 감사하는 한 편으로, 데스틴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온사방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 칭송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데스틴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출생에 관한 소문. 그것이 품은 어두움. 낳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그 현실. 그런 걸 자신의 아이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리 속도 위반에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못한 일이라고 해도, 양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까지 합쳐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미리암과 자신의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무감이 데스틴의 마음 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고, 모든 일들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데스틴은 한숨을 내쉬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들을 비웠다.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 잘 할 것이고, 

다 잘 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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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야, 데스틴 군 아닌가! 어디를 가시는가?"

"미리암의 집에 갑니다."

"그래? 이제 좀 있으면 애기아빠로구먼. 축하할 준비를 해야겠어!"

"감사합니다. 다 아저씨 덕이죠."

"뭔 내 덕은 하하하!"

 

학교를 마치고 미리암의 집으로 향하는 길. 데스틴은 농사를 위해 여기저기 펼쳐진 밭들을 지나쳐 가던 중에 그 동네의 쾌활한 아저씨와 인사를 주고 받는 중이었다. 동네의 다른 사람들이 밭을 돌보다 말고 그 광경에 하나 둘씩 더 모여들어 덕담들을 나누었다. 그들은 나름 자신들의 삶을 살아온 경험들을 건네주었고, 데스틴은 또 그에 맞춰 감사해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데스틴이 잠시 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 좋은 젊은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말야, 그런 쓸데없는 말들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그, 이 섹터에서 태어나지 않고 밖에서 온 불길한 아이라는 말 말이에요?"

"그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댄 건지 원."

"뭐 사람 일이야 모르는 법이니까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럴 일이 있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데스틴이 떠나자 수군덕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안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리암의 부모를 시샘하는 생각들도 깔려있었다. 결혼은 싫든 좋든, 집안과 집안이 만난다는 의미도 깔려있는 것. 일개 농부이던 사람들이 뱀파이어들로부터도 신뢰를 얻는 섹터장의 집안과 결혼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어쨌든 팔자가 피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데스틴이 미리암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그녀의 집에 자주 들르는 것과는 딴판으로 아버지인 로이드 프리드먼은 데스틴이 이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데 대해서. 

그런 저런 마음들이 한데 뒤엉켜 데스틴에 관한 뒷이야기들은 계속되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반신반의의 분위기만 이어졌고, 흐지부지해지는 분위기만 남긴 채 동네의 사람들은 다시 밭으로 흩어졌다. 

 

미리암의 집에 들어선 데스틴은 마침 집에서 나가려던 그녀의 아버지 이브라힘과 마주쳤다.  

 

"왔는가."

"안녕하십니까. 미리암을 보러 왔습니다."

"안쪽에 잠깐 누워 있다네. 난 다시 나가봐야 하네."   

"예. 장인어른."

"그렇게 부르지 말게."

"죄송합니다."

 

이브라힘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데스틴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브라힘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애쓰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크게 부른 배를 감싸고 누워있는 미리암과 그녀를 돌보는 그녀의 어머니 쟈스민이 데스틴을 반갑게 맞이했다. 쟈스민이 눈치껏 방을 나가주자, 데스틴은 미리암의 곁에 앉았다. 

 

"오셨어요, 여보."

"장인어른 심정을 이제야 알겠네. 그렇게 부르지 마. 너무 낯설다."

"뭐 어차피 계속 그렇게 부를텐데. 흐흣~"

 

미리암은 장난기를 더해 뱃속의 아기에게 '그지 아기야~' 하고 다정스레 불렀다. 그리고는 조금 어두운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아버지가 아직도 잘 대해 주지 않으셔?"

"음. 아직도 용서가 안 되시는 거겠지. 내가 학교 졸업 때문에 결혼식을 늦춘다고 하는 것도 핑계처럼 느끼고 계실테니."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시간이 가면 나아지려나."

 

데스틴은 미리암의 배에 뺨을 가져다 대자 마치 데스틴에게 대답이라도 해주듯 발로 차는 진동이 느껴졌다. 데스틴과 미리암은 서로를 놀랍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러나 경이로움과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눠야만 할 무거운 이야기가 버티고 있었기에.  

 

"오늘 말씀드리려고 해. 우리 상황이랑,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실까."

"나도......조금 두렵네."

 

데스틴은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 로이드를. 아버지는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학교의 다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식이 그렇게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 하고 기대가 큰 모습을 보였지만, 로이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데스틴으로서는 이 섹터를 책임지는 자리에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인정받기까지의 고초와 리더쉽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스틴은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어린 청년이었고, 아버지가 신경써주는 감정이 있었다면 하는 바램을 버리기가 힘든 시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그것도 분노를 불러일으킬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귀고 있던 여자를 임신시키고, 졸업하자마자 가족을 만들고 터를 잡겠다는 얘기를. 

 

"다, 괜찮을 거야."

"........."

 

미리암의 따스한 말에도 데스틴의 걱정은 다 가시지는 않았다. 그런 기미를 눈치챘는지, 미리암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시간이 가면 좀 더 나아지실거야. 그리고 우린 그런 모든 시선과 입방아들을 이겨내면서 같이 살겠다고 결심했고, 아이를 만들었지. 불안해하지 말자구."

"그래. 그러기로 했지. 힘내야지."

 

데스틴은 다시 미리암의 배에 뺨을 갖다대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들아~너희 엄마가 아니면 아빠는 어떤 바보가 됐을지 상상도 안간다아아~"

"아들인지는 어떻게 알고?"

"아들이어야만 해! 그것도 나처럼 멋지고 잘난!"

"어이구. 웃기시네? 아빠 닮은 바보아들 나오면 안 되니까 딸이 나와야지~흐흐흣~"

"에에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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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스민에게 인사를 하고 데스틴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브라힘은 천천히 집으로 들어왔다. 쟈스민은 그런 이브라힘을 보면서 무거운 맘으로 말을 걸었다. 

 

"이제 들어오셨수."

"그래. 미리암은?"

"아직 누워있죠. 그애가 어딜 나가겠어요."

"그래."

 

이브라힘은 미리암의 방문을 두드렸고, 곧 방으로 들어갔다. 이브라힘의 눈에, 십자가가 달린 벽 아래로 누워있는 미리암의 산처럼 부른 배가 보이자, 이브라힘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별일 없으시죠?"

"그래, 별일이라.......별일은 없지."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별일’은 많고 많았지만, 차마 배가 잔뜩 부른 딸에게 풀어놓을 수는 없기에, 이브라힘은 지친 발걸음을 돌렸다. 고된 농사일로도 전혀 덜어지지 않은 고뇌였다. 그 때 미리암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버지."

"왜 그러냐."

"이제 그만, 데스틴을 사위로 봐주실 수 없으세요? 이제 좀 있으면 정식으로 결혼도 할 건데....."

 

팽팽해져 있던 신경을 확 긁어버리는 말에 이브라힘은 돌아서면서 말했다. 

 

"그런걸 바라지 마라. 적어도 지금은."

"아버지....."

"뱀파이어들과 어울리는 부정한 집안이다. 신이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어렸을 때만 해도 뱀파이어 따위들은 햇빛에 사라져 주는게 나았을 존재들이야. 아니, 있는지조차 모를 괴물들이었지. 그놈들 자체가 악마라는 거다. 오 하느님이시여. 제 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버지!"

 

미리암의 화가 난 목소리가 방을 울리자 이브라힘은 움찔했다. 

 

"아버지가 어렸을 적 따윈 이제 없어요. 인간이 세상을 지배했던 때는 이제 없다구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현실을 봐야죠!"

"현실? 그래.......지금의 이 고통스러움이 현실이라면, 아버지는 견딜 힘이 없구나.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있으니......"

"그 하나님 아버지가 지금의 현실을 만들고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구요!"

"그런 불경한 소리일랑 꺼내지도 마라!"

 

이브라힘의 얼굴이 분노로 가득차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악마들을 인간들에게 주실 리가 없어! 인간들은 그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들이었단다! 우린 그저 악마들이 던져주는 시험을 받고 있는 것뿐이야. 그런 불경한 무리들과 내 딸이 맺어지는 것이 이 아버지는 괴롭다! 할 수만 있다면......." 

 

이브라힘은 말을 잠시 끊었다. 지금 뱉으려는 말은 신을 믿는 자로서 해서는 안되는 말이지만, 그런 입장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토해내는 게 지금은 오히려 그에겐 더 급한 일이었다. 

 

"그 아이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떼어버리고 싶다!"

 

끝내 미리암의 얼굴 위로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 얼굴을 보자 이브라힘은 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피곤하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꾸나. 그만 쉬어라."

“아버지.”

 

눈물을 닦아내고난 미리암의 얼굴은 완전히 냉랭해져 있었다. 

 

“지금 했던 모든 그 말들, 데스틴 앞에선 절대 하지 마세요. 아시죠.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이브라힘도 물론 알고 있었다. 인간이 조금이라도 뱀파이어에게 반항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그에 대한 뒤처리를 해야 하는 입장의 사람. 그것이 이 61번 섹터의 섹터장 로이드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었다. 아무리 그가 많이 봐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족이 될 사람이 이런 꼴이면 여러모로 불편해질 것은 뻔한 터. 이브라힘은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브라힘은 자신의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괴로운 처지는 누구도 돌아봐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악마들의 소굴에서 자신의 가족은 그저 평범하게 생을 마치기를 간절하게 원했었다. 하지만 악마들은 끝내 다가와 자신들을 휘젓고 있는 것이었다. 이 고통을, 이 분노를 혼자 삭혀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산 채로 불 속에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이브라힘은 침대에서 내려와 벽에 달린 십자가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신이시여. 어서 이 환란이, 고난이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천국의 문에 들 때에, 저 사악한 무리들이 모두 당신의 끔찍한 징벌을 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이것이 제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하소서. 제게 망각을 주소서. 제가 할 일을 주소서.’

 

늦은 밤, 섹터장의 관사. 

 

데스틴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처리하는 일들을 돕기 위해 몇 개의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간단한 일들은 데스틴도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었고,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이후에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섹터의 말단이 되어 조그만 집에서 행정 일을 하면서 미리암과 살겠다는 계획까지 오게 될 줄은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데스틴은 서류에 몇 개의 의견을 첨부해서 들고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관사의 바깥쪽 모퉁이에 자리한 집무실에서 아버지 로이드는 항상 늦게까지 일들을 보고 있었고, 지금도 다른 것은 없었다. 데스틴이 들어갔을 때, 책상과 소파, 서류정리를 위한 책꽃이, 창문에 걸린 긴 커튼 정도로 간소하게 꾸며진 집무실 안에서 로이드는 이것저것 높이 쌓여 있는 서류들을 하나씩 계속 들여다 보다가 데스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토가 끝났느냐."

"예. 몇 가지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동쪽 구역의 상인들과 농민들의 분쟁의 핵심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래. 알겠다. 거기 놔두거라."

 

로이드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서류의 산은 아무리 처리해도 줄어들지를 않고 있었지만, 로이드는 근면하게 그것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섹터장으로서의 섹터를 돌보는 기본 업무들, 황도 브리디아로부터 전달되어 온 공문들. 

 

과거 같으면야 인터넷과 컴퓨터로 모든 업무를 해결하려 하겠지만, 여황 카르밀라의 명으로 그러한 전자기기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상공업을 비롯한 인간들의 시스템은 폐기처분되고 필수적인 몇 개만 황도 브리디아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세상이었다. 세상의 모습은 반 이상이 중세 시절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었고, 처리 방식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의 조명만 해도 전기장치 같은 건 거의 없고 여러 개의 촛불들만이 자기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정도였다.  

 

여전히 결재서류들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데스틴은 방을 나가지 않았다. 로이드는 데스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눈치였고, 데스틴은 공연히 헛기침을 해댔다. 

 

“왜 나가지 않고 있느냐?”

“저......”

 

데스틴은 머뭇거렸다. 브랜치 양성학교의 멋지고 잘난 도련님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어색해하고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데스틴의 입에서 그동안의 일들이, 그리고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말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초조함과 긴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몸을 의자에 묻듯 눕힌 채 데스틴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데스틴은 그런 아버지의 반응에 더 두려움을 느꼈다. 이윽고 모든 말이 끝났고, 미리암과 결혼하겠다는 마지막 선언이 끝난 뒤, 어색한 침묵이 촛불들 사이에서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로이드는 천천히 일어나서는 책상의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서너 장의 종이들이었다. 그것을 들고 와서 로이드는 데스틴에게 소파에 안기를 권했다. 

 

“읽어보거라.”

 

로이드의 권유에 데스틴은 종이들을 펼쳐보았다. 곱게 써진 필체는 로이드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데스틴의 결혼과 뒷바라지에 관한 모든 항목들이었다. 메모처럼 써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소항목으로 들어가 필요한 것들과 준비해야 할 것들의 명목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데스틴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로이드를 바라보며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로이드였다. 

 

“애비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더냐.”

“.......죄......죄송합니다.”

“나는 네 애비가 아니더냐. 어떻게 이리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소식을 듣게 하느냐. 왜 이제야 이런 중요한 일을 나에게 얘기하느냐.”

“드릴 말이 없습니다.”

 

데스틴은 로이드를 마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로이드는 마주보던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틴의 옆으로 와서 데스틴을 내려다 보았고, 데스틴은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폭력은 절대 쓰지 않았지만, 위엄만은 언제나 굳건하고 무서운 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대, 아니 수십 대를 맞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 데스틴의 어깨로, 로이드의 따스한 손이 다가와 내려앉았다. 

 

“축하한다.”

 

데스틴이 놀라서 로이드를 올려다보자, 거기에는 감격스런 미소를 한가득 품은 로이드의 얼굴이 있었다. 

 

“뭔가, 더 많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것밖엔 내가 재주가 없더구나.”

“아....아버지....”

“다 괜찮다. 다 잘 될 거야.”

 

데스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어머니 레이첼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차를 준비해서 쟁반에 받쳐들고 집무실의 앞에서 이 모든 순간을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어머니도 다 알고 있단다.”

“당신, 정말 멋없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리 무겁지 않은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첼은 쟁반을 내려놓고 데스틴의 옆에 앉았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 엄마는 다 괜찮단다. 이제라도 말해주었으니 너무 기쁘고 고맙구나.”

“어머니......”

 

데스틴은 끝내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 따위는 이미 녹아내려버렸고, 뿌듯함과 따스함만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이 분들은,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진짜 부모님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들려온 뒷소문들과 시선들 따위는 이제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로이드는 헛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끝까지 멋없게 굴어서 미안하지만, 차는 쉬기도 할 겸 거실에서 마시고 싶으니 그 쪽에 먼저 가있지 않겠소? 나는 보던 것만 마저 보고 나가리다.”

 

으이그, 하는 듯한 레이첼의 표정을 바라보며 데스틴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신이 직접 쟁반을 들었다. 데스틴의 어깨를 레이첼이 감싸며 둘이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로이드는 그 자리에 서있던 채로 잠시 짧은 한숨을 지었다.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로이드는 아직 열려 있는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창문에 걸린 긴 커튼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목까지 드리운 은발과, 붉은 망토를 걸친 남자였다. 

 

“많이 컸군요.”

“그렇습니다.”

“노고가 많으셨군요. 전달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지금 모습을 보셨더라면.......그 분도 틀림없이 좋아하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은발의 남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이제, 조금 안심하실 때도 되신 것이 아니온지......”

“아시다시피......”

 

은발의 남자는 창문 쪽으로 다가가서, 로이드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뱀파이어들에게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라도 단지 티끌처럼 느껴질 뿐이지요.”

 

그 말로 인해 로이드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데스틴이 죽기 전까지는 전혀 감시의 눈을 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결혼은 데스틴에게는 ‘다른 의미로’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차의 향기가 좋더군요. 식기 전에 드시지요.”

 

은발의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창문 밖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로이드는 창문을 닫으려 다가갔다. 창밖의 어둠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고, 촛불을 쓸 수 있는 섹터 내의 주거지들에는 모두 어슴푸레한 빛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안개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 달갑지 않은 기분이 속에서 일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로이드는 창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당겨 창밖의 풍경을 가렸다. 

 

마치 영원히 밝아지지 않으려는 어둠의 침입을 막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꼼꼼하고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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